
안동 시외버스 터미널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46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하차하면 된다. 약 4-50분이
걸리고, 하루에 8번 왕복하는데 막차가 저녁 6시 10분이면 끊기므로 조금은 신경을 써야 한다. 버스 정류장에 있는 중앙약국에 46번 버스의
시간표가 붙어있다. 버스요금은 1050원.(1999년 5월 13일 현재)

하회마을이 포함된 풍천면은 신라시대에는 하지현의 일부였고, 경덕왕 때는 영안이라 하였으며, 고려초에는
순주로 승격되었다가 견훤의 침공 후에는 다시 하지현으로 강등되었으며 고려 8대 현종때에 풍산현으로 개칭되어 안동군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풍산현으로 계속되다가 말기에 풍사면으로 4분되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변경시에 풍천면으로 재조정되었다.
지금 하회류씨가 자리잡은 이곳에는 이미 그전에 2개 성씨가 먼저 자리잡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허씨들은 마을의 주산인 화산을 등지고 화천을 앞에 두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모양을 택했다. 다음으로 안씨가 들어오게 되었으나, 허씨가 이미
모둠살이를 하고 있는 화산 남쪽 기슭은 넘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거묵실골을 피해서 화산의 북쪽 기슭인 행개골에 별도로 마을을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이 마을에 들어온 하회류씨에게 남은 땅이란 지금의 하회마을인 화천강변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하회마을이 늘 조심하는 것은 해마다 장마철이면 쏟아지는 빗줄기인데 다행스럽게도 강물이 마을로 범람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허씨와 안씨가
살던 거묵실골과 행개골은 해체되고 없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하회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바닷가에 사는 것은 강가에 사는 것만 못하고 강가에 사는 것은 시냇가에 사는 것만 못하다. 대체로 시냇가의 삶은
반드시 큰 고개에서 멀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평시건 난시건 오래 살 수 있다. 그런 계거처로는 영남의 도산과 하회가 제일이다.'
'택리지'가 보증하는 하회는 풍산들판의 꽃뫼(花山)를 꽃내(花川)가 오메가자를 쓰듯 반 바퀴를 휘돌아나가므로
'물돌이동(河回洞)'이라고도 하는데 풍수상으로는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이라한다.그래서 큰 인물이 많이 나왔고, 평온을 유지했던 것이다. 서애
류성룡과 그의 형인 류운룡에 의해 가문이 크게 일어난 이 풍산류씨(또는 하회류씨)의 하회마을에는 지금 서애 종택인 충효당과 겸암 종택인 양진당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북촌댁, 남촌댁, 빈연정사, 원지정사 등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건물이 많고 많아 전통 한옥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살피는데
여기만큼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곳도 없다.
더욱이 하회는 예스러운 분위기를 지키기 위하여 전기줄을 모두 지하로 묻어놓아 돌담을 끼고 도는 고샅길을
걷노라면 은연중 조선시대 정취조차 느껴지는 고격이 일어난다. 물위에 떠 있는 연꽃 형상이라더니 강 쪽으로 비스듬히 내려뻗은 밭고랑에는 장다리,
배추, 콩, 옥수수 같은 밭작물과 키 큰 해바라기, 코스모스, 달리아 같은 들꽃들이 뒤섞이면서 답사객의 산책길을 자꾸만 먼 곳까지
이끌어낸다.
마을을 한바퀴 돌다 보면 발길은 어느덧 강변의 송림(만송정)으로 향하게 된다. 이 솔밭은 방풍을 위한
인공조림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마을 풍수의 비보책이라고도 하는데 흔히는 동수(洞樹), 이곳 말로는 그냥 '쑤'라고 부른다.
하회 답사는 그냥 스쳐가는 답사로는 너무 아쉽고 안타깝다. '가장 큰 민박집'이든 '가장 좋은 민박집'이든
한옥에 민박하여 뜨뜻한 구들장, 시원한 구들장에서 하룻밤을 지내보고, 하회탈춤도 보고, 무엇보다도 화천 건너 옥연정사에 가서 낮잠도 자보고,
아슬아슬한 부용대 벼랑에 올라 화산 아래 납작하게 들어앉은 물돌이동의 자리매김새도 보면서 수려한 풍광과 예스러운 분위기가 연출하는 포근한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에 힘과 권위를 더해주는 '쑤'의 의미까지 살필 때 우리는 비로소 하회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글 -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