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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지마할

 

    인류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건축으로 불리는 타지마할은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 죽은 아내를 위해 자한 황제가 국력을 기울여 지은 이슬람 예술의 정수이다. 잘 꾸며진 정원을 배경으로 관목이 줄지어 선 정면 연못에 비치는 타지마할의 정경은 물질의 세계를 뛰어넘은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섬세하게 조각된 흰 대리석, 더할 수 없이 완벽한 비례, 아름다운 조경이 어우러진 탁월한 건축을 만든 세기적 로맨스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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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지마할 들여다 보기

    아그라(Agra)는 비교적 역사가 짧은 도시로 16세기에 무굴 제국의수도가 되었다. 델리의 마지막 군주 씨칸데르 로디(Sikander Lodi)가 1505년에 아그라 성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승한 티무리드 왕조의 바부르(Babur)는 야무나 강둑에 페르시아 샤하르 바흐 양식의 정원을 만들었다. 아크바르(Akbar) 대제에 이르러 무굴제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벵골, 카시미르에서 중앙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아그라에 파테흐푸르(Fatehpur) 성을 세웠다. 아크바르의 손자 햐흐 자한(Shah Jahan)은 흰 대리석을 좋아해서 파테흐푸르 성에 있는 치시티(Chishti)의 성소 외관을 대리석으로 교체했다. 그후 아내 뭄타즈(Mumtaz Mahal)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그는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무굴 건축의 백미인 타지마할(Taji Mahal)을 건설하였다.

    인도의 건축이 단순하고 보잘것 없다는 편견은 무굴 건축의 양식과 장식예술에서 나타나는 풍부함과 다양함을 알지 못해서이다. 현재는 그 이름이나 파편들만 남았지만 강변을 따라 정원과 테라스 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아그라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타지마할은 네 구석에 첨탑을 가진 네모반듯한 기단의 중앙부에 있는데, 이슬람 장식미술의 정수를 모은 인도, 페르시아 양식의 대표적 건물이다. 타지마할에서는 알함브라(Alhambra)궁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비물질적인 우아함이 느껴진다. 깊게 음영이 드리워진 흰 대리석 면은 얇고 투명해 보인다. 이슬람 군주의 영묘에 사용된 돔은 비잔틴 시대에 시작되었다. 타지마할의 돔은 이중으로 구성되었는데 외부 돔은 높이가 44m에 이른다. 돔 주위로 4개의 키오스크를 배치하여 거대한 돔이 작아 보이도록 배려하였다. 또 건물 전체가 큰 풍선같은 돔에 의해 띄워져 지면에 닿아 있지 않은 듯한 느낌을 준다. 기단의 단부에 있는 첨탑과 거리를 두고 좌우 대칭으로 서 있는 별관들은 적절한 비례로 연관되어 있어서 중앙의 치솟는 듯한 움직임에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아름답게 계획된 경관은 건축적 효과를 배가하는데, 과목들이 줄지어 서 있는 정면의 연못에는 타지마할의 차가운 하얀 색이 물 속에서 떠오른다. 타지마할은 알함브라 궁전의 부서질 듯한 우아함을 상기하지만 그 복잡 미묘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것을 능가한다.

2. 위대한 사랑의 시학적 공간, 타지마할

    런던발 델리행 비행기 안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새벽에 델리에 도착한다. 공항을 나서자 바로 장바닥이다. 탈탈거리는 고물 택시를 타고 타지마할 인터콘티넬털 호텔로 간다. 외교관 단지 안의 호텔이다. 이곳에는 델리 속에서 델리를 탈출한 공간들이 있다. 물가가 비싼 곳에서는 얌전한 호텔레 묵는다. 여행의 작은 경험이다. 한숨 잤으면 좋겠지만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에 다녀오려면 열다섯 시간이 필요하다. 방에 가서 샤워만 하고 아그라로 떠나기로 한다. 잠도 못자고 밤새 유라시아 대륙을 날아와서 한 시간 만에 다시 열다섯 시간의 장정에 오른다.

    잠시 시간을 내서 호텔 정원을 거닌다. 풀장 주위에 아름다운 꽃을 많이도 심었다. 꽃과 나무를 사랑한 무굴 제국의 후예답다. 인도에 관해서는 중국만큼도 모른다. 문명의 발상지는 바로 건축과 도시의 발상지이므로 이곳에 대한 곡고학적 탐험은 건축의 본질에 닿는 좋은 길이 될 수 있을 텐데 무심하였다. 72년 대홍수 때 3년에 걸쳐 쓴 "영원한 현재"라는 논문을 온실에 두었다가 물에 잠겨 잃어 버린 후 더 연구를 못 하였다. 문명 발상지에서의 건축과 도시의 의미에 대한 글이었다. 이집트, 인도, 아랍에 대하 ㄴ역사 연구를 다시 해보자. 시간을 적절히 쓰는 공부를 해야 한다. 매일 세 시간은 책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줄을 긋고 주를 달면서 책을 읽어야 한다. 편한 독서는 견문만 넓힐 뿐 일에 직접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225Km 남짓한 거리지만 아그라로 가는 길은 차선도 없는 시골길이라 한도 없이 간다. 유리가 없거나 문짝이 없는 고물차들이 천천히 달리는데 어쩐지 모양새가 이상하다. 기이하게도 많은 차들이 백미러가 없는 것이었다. 계속 추월해도 더디다. 바람에 흙이 흩날린다. 두 시간쯤 가다가 델리와 아그라를 오가는 관광객들을 위한 식당에서 이들의 전통음식을 먹는다. 인도에서는 소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대부분의 요리가 닭과 양고기다. 관광식당이어선지 맵지는 않다. 그러나 입에 맞는 것은 치킨수프밖에 없다.

    드디어 아그라에 도착한다. 모스크가 보이기시작한다. 아크라르대제의 수도 아그라에 왔다. 인도의 역사를 잘 모르고 무굴제국의 수도 아그라는 알지 못해도 타지마할은 누구나 다 안다. 황제가 먼저 간 그의 부인을 위해 지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라는 신화의 현장이다. 대문 공간을 지나 안으로 들어선다. 너무나 익숙한 백색 대리석의 타지마할이 나타난다. 예사롭지 않은 형국이다. 기단 네 곳의 첨탑과 중의 영묘가 주기단과 하나가 되어 중앙대문과 조우한다. 사방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문과 영묘 중앙에 대리석 기단이 있다. 대단한 비례감각이다. 건축으로 서 있는 것을 넘어 어떤 신비로운 세계를 표상한다. 비현실적인 공간의 밀도와 비례를 갖고 있다. 회랑과 정원과 사방의 건물이 먼 경치와 하늘과 함께 이루는 공간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앞으로 더 다가서면 그러한 고도의 미학적 질서가 깨어지고 어디서나 대할 수 있는 평범한 건물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성 바씰리 사원이 동적 변환의 질서를 가진 데 비해 타지마할은 정적균제의 질서로 이루어져 있어 예정된 장소에서만 정수가 보이기 때문이다. 타지마할은 기본적인 공간 형식면에서 기존의 전형을 따라서 언뜻 보면 흔한 건물 같지만 최종적인 마감과 공간 구성의 비례가 새로운 건축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타지마할은 아내와 지난 시간을 물상을 통해 현재의 시간 속에 재현해내려고 한 건축이다. 아무도 없는 날 혼자 와보고 싶다. 아무도 없어야 한다. 타지마할이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바로 그들 두 사람만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타지마할은 두 사람의 죽음이 영원한 만남을 기도하는 장소이다.

    건축은 건축가가 이해하는 것보다 더 넓고 깊은 의미로서 실재한다. 건축은 의미형식이 시각형식으로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뻬리끌레스(Pericles) 시대의 빠르테논과 오늘의 빠르테논은 다르다. 제신의 신전이었던 빤테온과 관광명소인 빤테온은 다르게 실재한다. 건축이라는 이름의 역사적 분석이나 미학적 접근은 오히려 건축을 조형예술에 국한시키는 일이다. 건축공간은 의미형식이 물상을 지배할 때 뜻이 있게 된다. 건축은 물상의 미학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설화의 세계와 의미의 미학을 표현할 때 인류의 유산이 되는 것이다. 기왕의 건축형식을 답습하는 가운데 기존의 양식이 이루지 못한 미학적 완전성과 철학적 깊이를 이루어낸 타지마할은 위대한 사랑의 시학적 공간이며 삶과 죽음의 이어짐을 물상화한 형이상학적인 공간이다.

    내부공간으로 들어선다. 절제된 침묵의 공간 사방으로 빛이 이동한다. 회랑 안쪽 팔각의 공간에 샤흐 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관이 놓여 있고 지하에 그들의 시신이 있다. 빛은 정밀하게 세공된 대리석 벽의 무늬들 사이로 밝음과 어둠으로만 온다. 밤에는 별빛과 달빛이 흰 대리석에 반사되어 신비한 밝음을 유지한다. 비와 바람이 없는 지하의 무덤위로 지상의 빛이 죽음의 공간을 배회한다. 사람에게 실재하는 것은 빛 가운데 있는 것이다. 밤과 낮의윤회하는 빛 가운데 놓인 관아래 그들이 누워 있다. 22년 동안 죽은 아내를 그리워한 황제의 마음이 가득한 공간이다.

    오늘이 마침 보름 다음날이다. 달에 비추이는 타지마할의 신비한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기록을 보았는데 시간이 없어 직접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샤흐자한이 아내가 죽은 후 혼자 살다가 아들에게 유폐되었던 아그라 성으로 간다. 아크바르 대제가 세운 무굴 제국의 위대한 성이다. 그는 아들 자한기르를 위해 영원의 성을 쌓았고, 그의 손자 샤흐자한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국력을 기울여 타지마할을 지은 것이다. 그런 감상으로 찾은 아그라 성은 타지마할의 거울밖 현실이었다.

    타지마할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름달보다 강 건의 아그라 성에 먼저 가보아야 한다. 그래야 건축이 무엇을 했고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이곳에서 보는 타지마할은 피안의 세계에 선 실재이다. 입구 지역의 성문과 중정을 지나면 하나하나가 별개의 세계인 것으로 느껴지는 또다른 중정으로 이어진다. 모든 건축군은 이 중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델리에서 아그라로 오는 도중에 보였던 벌판이 성채의 오아시스 속에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아그라 성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벌판에 만든 인간의 조물주에 대한 도전의 장소이다. 아들에게 8년간이나 유폐된 샤흐자한이 아그라 성에 갇혀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시간에는 어느 장소에서든 아무 생각없이 오래 있고 싶다.

    서서히 어둠이 다가온다. 아크바르 대제의 성 앞에 그의 신민의 후손들이 허한 모습으로 무리지어 모여 있다. 다시 델리로 향한다. 달리고 달려도 갈 길이 멀다. 컨테이너와 트럭의 중간쯤 되는 짐차가 한도없이 다닌다. 그러나 털털거리는 고물 짐차에는 값도 나가지 않는 큰 짐만 실려 있다. 위대한 문명이 가난에 밀려 더 안쓰럽다. 사람을 짐처럼 가득 채운 차가 간다. 인생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잠시의 다리라 해도 닭을 싣듯 차에 가득 실려가는 소년소녀의 맑은 얼굴은 타지마할의 독존을 문득 답답하게 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삶이 부와 지성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문명보다 아래에 있는 것일까. 가난이 나라 전체에 가득한데 이들의 얼굴에 깃들인 평화와 지혜는 어디에서 오늘 것일까. 위대한 문명국가의 가난과 문화적 유산의 기이한 공존이 문득 혼돈시럽다.

    열두시가 넘어 델리에 도착하였다. 피곤하나 오늘의 느낌을 떨치고 그냥 자기 힘들어 인도산의 와인을 마신다. 건축을 처음 시작할때부터 보고 싶었던 공간을 보고 난 감상을 회상한다. 타지마할은 겨울 350년밖에 되지 않았고 건축의 역사에는 위대한 건축들이 수없이 많으나어느 건축보다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샤흐자한과 건축가 우스타드 아흐마드(Ustad Ahmad)는 무굴제국의 전통과 그들의 개인적 삶의 광맥에서 찾은 시적 영감과 미술적 재능으로 이승과 저승사이에 사라오가 죽음의 시학적 공간을 만들었다.

    다른 건축과 달리 타지마할은 시간과 장소의 어느 정지된 순간에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신비의 모습을 드러낸다. 정면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순간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으로 현현하다. 타지마할의 형태는 일견 비할 수 없이 단순하고 순수해 보인다. 그러나 서서히 다가서면 형언할 수 없는 다양한 형상언어가 드러난다. 마치달빛으로 빚은 듯한 아름다운 미술적 세공과 절묘한 비례의 공간형식이 환상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타지마할의 건축적 회랑과 정원과 영묘가 만들어내는 외부의 조화가 내부공간으로 이어져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중앙홀의 돔에는 아무런 빛이 없다. 서양건축의 성전은 중앙홀에서 빛이 시작하는 데 비해 타지마할은 빛이 위가 아닌 옆으로부터 와서 영원히 잡히지 않는 신비의 실재를 드러내 보인다.

    타지마할의 진정한 모습은 흰 대리석의 영묘만이 아닌 묘역 전체에 있다. 나아가 야무나 강과 아그라 성 그리고 타지마할이 이루는 큰 형상은 놓쳐서는 안될 조화이다. 그곳에는 저 세상과 이 세상이 함께한다. 학자들은 타지마할이 낙원을 상지앟는 저원 한가운데가 아닌 강가에 서 있고 네 면에 새겨진 "코란"이 모두 심판의 날과 부활의 날에 관한 것이라가 하여,낙원의이미지보다 최후 심판일의 성좌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건축의 본질적 의미는 지을 당시의 논리에 구속되지 않는다. 필요에 국한된 건축은 당대에 의미가 소멸하지만 본질을 말하는 건축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열네번째 아기를 낳다가 죽은 아내를 위해서 샤흐자한은 22년만에 걸쳐 그녀의 무덤을 지었다. 그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영원의 낙원과 최후의 심판, 실재와 비실재의 이중 이미지를 통해 인류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천년건축을 알기 위해 역사를 알아야 하지만 참다운 천년건축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조형언어로 역사의 으미를 말한다. 타지마할에서 삶과 죽음의 시간과 공간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름다움을 아는 것이 아니다.

     

     

                                                                김석철의 세계 건축기행. 김석철. 1997. (주)창작과 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