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검은 바지

HL1YE 이현철 신부

  며칠 전에 저희 수도회의 재속회, 즉 예수 사제회 소속인 대구 평화방송의 이성구 신부님이 이곳 로마에 오셨 습니다. 일부러 연락을 안한 것은 이곳에서 공부하는 분들에 대한 배려(?)였다고 합니다. 뇌성 마비의 아들을 둔 한 가족과 함께 2주간의 일정으로 차를 대절하여 프랑스의 루르드, 떼제 등을 거쳐 이탈리아의 로마에 도착할 즈음에는 몇 달 만에 소나기가 이곳에 쏟아지는 경사가 있어, 비를 몰고 왔노라며 개선 장군처럼 로마에 입성(?)했 습니다.
  점심을 대접하고 저도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순례하기 위해 광장을 거쳐 성당 정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는데, 천국의 열쇠를 가진 수문장 베드로와 같은 경비원이 복장 불량(반바지)이라며 그 아버지를 성당에 못 들 어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휠체어를 그 아버지가 밀기 때문에 아버지가 못 들어가면 한국에서 이곳까지 온 그 아들도 함께 못 들어가는 딱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보다 못해 바지를 벗어 주려고 할 때, 순례객 사이로 누가 검은 바지를 들고 흔들어 대었습니다. 아마 저와 같은 마음으로 누가 바지를 벗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얻어 입은 바지를 저희에게 주는 것인지, 저희가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기 전에 금세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저희는 그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성당을 순례하고 저희도 복장 불량으로 못 들어오고 안타까워하는 털보 아저씨에 게 수호 천사가 되어 주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수도원으로 돌아오면서 80년 초에 만났던 천사들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습니다. 전국 성가 경연 대회가 서울 류관순 기념관에서 있었습니다. 대구 대교구의 대표로 저희 삼덕 성당이 계산 성당과 함께 본선에 올랐습니다. 성가대 총무로서 모든 연습과 모든 일정을 준비하고도 저는 어떤 사정으로 서울에 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성당을 소개하는 인사문을 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핑계로 본선이 열리고 있는 서울 대회장 으로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복장 불량(?)이라 검은 바지를 구해야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 다. 영하 10도 이하의 추운 겨울인데 누가 쉽게 바지를 벗어 빌려 주겠습니까? 하지만 그곳에도 수호 천사가 있었 습니다. 행사 안내를 위해 나와 있었던 서울 가톨릭 신학 대학 학생들이 바지를 무려 3개나 구해다 주면서 맞는 걸 골라 입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무대 뒤에서 바지를 갈아입으며 이 추위에 벌벌 떨면서 있을 신학생들을 생각하 니 너무나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후에, 후에… 제가 서울 신학교에 편입하게 되자 그때 바지를 빌려 준 학생들을 만나려고 수소문해 봤지만 허사였습니다. 모두 군에 갔는지, 하늘로 날아갔는지…?
  그 후 첫서원을 하고 저에게 시련이 왔습니다. 논현동 분원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수도회를 떠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구로 휴가를 가서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리려고 했지만 도저히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데 어머니는 저의 검은 바지의 밑단이 해어지고 닳았다고 하시며 검은 바지를 새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검은 바지를 입을 일도 없을 텐데, 바지는 무슨 바지? 하면서 저는 못 들은 척하며 딴청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저희 어머니는 제가 자는 틈을 노려 허리 치수를 재어 하나더 양복점에서 바지를 무려 2개나 맞추어, 제가 다시 서울로 올라갈 때 가져가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리 치수를 잘 못 재어 모두 허리가 한복처럼 헐렁하여 도저히 입을 수가 없고, 화도 나기도 해서 안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후에, 후에… 로마에 와서 대학원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살이 쪄서 맞는 바지는 천사의 검은 바지뿐이었습니다. *



＊위의 글은 로마에 가 계시는 이현철(HL1YE) 신부님이 김광석(HL2AWO) 회장님 앞으로 보내신 가브리엘 통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글이 열네 번째 통신문인 것을 보면 단순한 편지라기보다 마르코니 회원 모두가 공유해도 될 리포트인 것 같습니다.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늘 우리 회원 들과 함께 하시는 신부님의 깊은 배려에 감사드리며, 회장님의 허락으로 머리말로 삼았습니다. －HL1MJ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