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니 가족 여러분께

제22호 1996년 7월 3일
  
  우기로 접어들었지만 날씨만 덥고 빗방울은 거의 비치지 않는 이곳 대만에서 
마르코니 가족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그 동안 모든 가족들 별고 없이 잘 지내
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 역시 하느님, 그리고 여러분 덕분에 열심히 살고 있
습니다. 선교를 목적으로 이곳 대만으로 왔지만 우선 중국어를 배워야 하는 
입장이어서 현재 新竹(Hsinchu) 교구 교구청에서 말 배우고, 주교님 따라 교구 
내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현지 감각을 익히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
니다.
  
  아마 지난 6월 5일 마르코니 정기 교신에 참여하셨거나 듣고 계셨던 가족들 
중에 조금 놀라셨을 분도 계셨으리라 짐작합니다. 대만에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제가 정기 교신에 그렇게 빨리 참여할 수 있게 되리라곤 생각 조차 못 하
셨을 테니까요. 그러나 저에게는 그 날이 너무 더디 왔었고, 또한 정기 교신은 
왜 그렇게도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정기 교신 
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었고, 기대 역시 굉장했으니까요. 더군다나 그 날 주제가 
현충일을 맞이한  나라 사랑의 길 이었습니다. 이국에서 현충일을 맞이하는 
저에게는 그 주제가 특히나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흔히들  외국에 나가 보면 
모두가 애국자가 된다. 는 말 그대로, 예전에 한국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모든 사물들, 현상들, 사람들, 내 나라 냄새, 하다 못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
던 우리 집 단골 손님이었던 험상 궂은 걸인들조차 그리워지던 때였으니까요.
  사실 여기 대만에서 BV3/DS1DAT라는 콜사인을 얻기까지 많은 우여 곡절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한국에서 미리 HF 트랜시버를 준비해 갔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마이크를 잡을 수 있을지 참으로 막막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처음 
여기 도착하고 나서 일 주일 정도는 기후, 음식 적응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일 주일이 지나니까 비로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시내 구경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 때부터 거짓말 조금 보태고 매일 지붕만 쳐다보면서 
다녔습니다. 이유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웬놈의 GP 안테나가 
그리도 많은지요. 분명히 아마추어용 3, 4단 GP 안테나들인데, 무조건 좌충
우돌, 들어가서 떠듬떠듬 중국어 섞어 물어 보면  웬 굴러먹던 개뼈다귄가?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新竹 시내를  상가집 개처럼 쑤시고 
다니던 어느 날, 건성건성 하늘을 쳐다보며 길을 걷는데 눈이 번쩍 뜨이는 
광경이 보였습니다. 그 위용도 당당한 3ele 야기 안테나, 그리고 철탑, 오종종
한 간장 종지 모양의 로테이터가 버티고 서 있는 그 광경! 부리나케 달려가 
보니  竹儀電機商行 이라는 간판과 함께 아마추어 무선용 기자재들을 팔고 있는 
햄 숍이 보였고, 거기서 BV3BW Bill Luo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숍 
주인은 BV3AA이고, Bill은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들 도움
으로 지금의 portable callsign 내고, 또 V type DP 안테나도 올리게 되었습
니다. 그 과정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고 헌신적으로 도와 준 Bill의 호의는 
지면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것입니다.

  안테나 올리고, 트랜시버를 연결하여 제일 먼저 주파수를 동조시켜 본 곳이 
7.090MHz, 한국 햄들이 주로 QRV하고 계시는 곳이었습니다. 불행히도 40m VSWR 
값이 너무나도 좋지 못해서 고민하다가 HL2AWO 김광석 회장께 전화를 드려 
21MHz 스케줄 QSO를 부탁드렸습니다. 그 과정 중에 또 HL1KIS 이양현 OM께서도
모니터링해주시고 해서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우리 마르코니 네트에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편지를 마르코니 가족 여러분께 드리면서, 처음부터 감사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가족들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
다. 또한 관심도 가져 주셨고요. 감사합니다. 사제들은 늘 그런 평생 다 갚지 
못할 빚 속에서 살아가야 할 운명에로 짝지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HL0KMS가 사무실도 이전하고, 안테나도 새로 옮기고, 또 전화도 가설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아마 많은 가족들의 노고가 깃들여졌겠지요. 앞으로도 더욱 
알차고 사랑이 넘치는 네트를 기대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또한 고국이 그리울 
땐 매주 수요일 저녁 10시를 위안 삼겠습니다. 거기서 언제나 정이 넘치는 
목소리를 제 기쁨으로 삼겠습니다.

  늘 건강들 하시도록 하느님 안에서 기도합니다.

  1996. 6. 15. 토요일, 대만에서
  BV3/DS1DAT, 이영갑 신부 드림